1. 청자
고려의 비색은 12세기를 정점으로 중국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어 칭송을 받았다. 중국 남송 시대 태평 노인이 지었다고 전하는 『수중금』에는 "건주의 차, 촉 지방의 비단, 정요 백자, 절강의 차, 고려 비색 모두 천하의 제일인데 다른 곳에서는 따라 하고자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라고 해 천하의 명품들 가운데 고려청자를 포함시키고 있다.
청자는 유악과 태토에 포함된 적은 양의 산화철이 환원해서 생긴 푸른색의 자기이다. 고려 도공들이 이런 청자를 개발한 것은 10세기 무렵이었다. 그리고 12세기 전반기, 고려의 청자 기술은 가장 세련된 순청자를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의 도공들은 청자 기와도 만들어 냈다고 한다. 고려의 요업 기술이 높은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12세기 전반에서 중엽에 이르는 시기에 고려 도공들은 도자 공예에서 새로운 경지에 들어서는 기술을 창출했다. 상감 청자를 개발한 것이다. 상감 기술은 그릇의 표면을 파고 그 속에 백토 혹은 흑토를 메워서 청자의 푸른 바탕에 백식과 흑색의 무늬를 장식하는 기법이다. 이것은 자기 제조에서 전혀 새로운 기술이었다. 이 기술의 개발로 고려청자는 그 아름다운 푸른빛에 흑백의 선명한 도안이 화사하게 장식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기의 장식 기술은 그 폭이 훨씬 넓어졌다.
이 상감 기술은 고려청자에 있어서 유약의 조제 기술과 함께 특징 있는 기술로 평가된다. 최근의 기술 고고학적 분석에 따르면 고려청자는 송·원의 청자와 유약과 태토의 성분 구성, 소성 온도, 소성 시간과 분위기 등에서 기술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고려청자는 그릇의 모양과 디자인에서뿐만 아니라 도자기의 미세 구조와 색깔에서 중국의 청자와는 다른 공정 변수를 가지고 있다. 고려 도공들은 그들 나름의 청자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특색 있는 기술 공정과 작품의 기법을 개발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자기에 붉은색을 내는 구리의 발색 기법을 창출했다.
고려인들은 상감이라는 공예 기법을 과감히 도자기에 적용해 성공을 거뒀다. 상감은 바탕이 되는 재료의 성격이 서로 다르거나 또는 바탕과 색이 다른 물질을 집어넣는 공예 기법으로 동서양에서 모두 오래전부터 해 오던 것이다. 고려의 금속 공예에서는 입사라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12세기를 전후해 상감 기술은 본격적인 성공을 거뒀으며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초를 거치면서 전국적으로 활성화되어 전성기를 누린다. 강진과 부안 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발달한 상감 청자는 문양에 메워 넣은 희색과 검은색의 흙이 옥빛의 푸른 바탕 위에 강한 색채의 대비를 이뤄 그동안의 청자가 지녀 온 단색 위주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다채롭고 장식적인 새로운 면모를 보여 준다.
자기의 출현은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관련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기의 제작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수요층과 자기를 제작할 수 있는 전문적인 집단이 있어야 가능하다.
지금까지 출토된 고려자기 가운데는 다완 유형의 제품들이 많다. 이는 선종의 수양에서 중시하는 좌선에 필요한 차를 담는 다기였으리라 추측된다. 고려 왕조에 들어 차가 승려와 귀족들의 기호품이 되고 왕실, 정부와 불교 교단의 각종 행사에서 필수 품목으로 자리 잡으면서 다기류의 청자가 대량 제작되었던 것이다.
자기의 제작은 짧은 기간 안에 기술을 습득하기 어려운 분야이다. 따라서 오랜 기간에 걸친 숙련이 필요하다. 이는 자기의 제작을 담당했던 전문가 집단이 존재했음을 뜻한다. 그것은 수공업 전문 집단인 '소'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이들은 왕실과 귀족, 승려층의 요구에 부응해 자기를 제작했을 것이다. 고도의 예술성을 보여 주는 청자 문화는 이처럼 문화의 향유자층과 생산자층이 분리되어, 향유자의 욕구와 취미에 맞게 생산되다는 특징을 지닌다. 향유자층과 생산자층을 연결해 주는 사회적 제도가 바로 소였던 것이다.
고려청자의 주 생산지는 전라도 강진과 부안을 중심으로 한 서해안 일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지역은 일찍부터 선종이 유행했고, 차 생산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 차 문화가 발달했으며, 그에 따라 다기류의 수요도 많았다. 또 지리적으로 중국의 선진적인 제작 기술이 황해로 쉽게 유입될 수 있었다. 강진과 부안의 가마터들은 모두 조창이 있는 바닷가 근처에 위치하며 자토와 물과 나무가 풍부한 곳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여기에서 만들어진 자기들은 서해안의 조운로를 거쳐 수도 개경으로 소송됐다.
고려 말 왜구들의 잦은 출몰로 해안가에 자리 잡은 강진과 부안의 가마는 문을 닫아야 했다.
[출처] 장남원(2007), 『한국 문화와 유물 유적』,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국사 편찬 위원회(1994), 『신편한국사』,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탐구당. 구만옥(2008),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지식산업사.
김인호 외(2011),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2』, 웅진지식하우스.
2. 자기에 이름을 붙이는 방법
① 도자기의 종류를 나타낸다 (예: 청자, 백자).
② 기법을 나타내는 말을 쓴다.
③ 문양(무늬)을 나타내는 말을 쓴다.
④ 용도, 형태를 나타낸다(매병, 주전자 등).
3. 고려청자의 기법
① 상감: 그릇 몸체에 이색 물질을 넣어 문양을 나타내는 장식 기법이다. 원래 금속 공예에서는 은입사의 장식 수법이 개발되고 발전해 오면서 이러한 수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다.
② 양각: 그림이나 글자를 도드라지게 새기는 방법이다.
③ 음악: 그림이나 글씨 따위를 오목하게 새기는 방법이다.
④ 투각: 조각의 한 가지로 재료를 앞면에서 뒷면까지 완전히 파서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4. 상감 청자와 기술의 교류
독자적인 기술이라 하더라도 외부로부터 수용해 변용과 창조의 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한다. 고려 왕조 시절 국제 질서는 고려와 송, 거란, 금, 일본 등이 다양하게 교류한 다원적인 사회였다. 고려는 송 외에 여러 국가와 교류했다. 더욱이 거란과의 전쟁이 끝난 1021년부터 50년간 고려는 송과 국교를 단절한 상태였다. 민간 교류는 계속되었지만 국교 단절은 아무래도 새로운 기술의 수용과 교류에 제한을 주게 마련이다. 송과의 국교 단절 이후 고려의 공예 기술은 거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고려에 항복한 거란 포로 수만 명 가운데 10명 중 한 명은 기술자인데 그 가운데 기술이 정교한 자를 뽑아 고려에 머물게 했다. 이들로 인해 고려의 그릇과 옷 제조 기술이 더욱 정교하게 되었다.
고려가 거란으로부터 도자기 등 그릇 제조 기술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려 주는 『고려도경』의 기록이다. 상감 기술은 금속 제품이나 나전 칠기를 만들 때 금이나 은을 잘게 실 모양으로 꼬아 문양 주변에 테두리로 두르고 그 속에 조개껍데기 등을 박아 넣는 기술인 입사에서 유래된 것이다. 입사는 거란의 전통적인 공예 기법으로 고려의 상감 기술은 거란의 기술과 관계를 맺고 있다. 송으로부터 상감 기술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주장은 온당치 않다.
[출처] 박종기(2015), 『고려사의 재발견』, 휴머니스트』. 초등학교 5~6학년 군 사회과 지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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